누가복음 15장 묵상,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누가복음 15장 11-24절 묵상.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났다가 돌이킨 둘째 아들과,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달려간 아버지를 묵상합니다. 묵상 질문 3가지와 기도문을 함께 담았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본문 속으로
누가복음 15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절)며 수군거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 셋을 이어서 들려주셨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하나를 잃은 사람, 드라크마 열 개 가운데 하나를 잃은 여자, 그리고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앞의 두 비유에는 같은 장면이 나온다. 잃은 것을 찾아낸 사람이 벗과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즐기자"고 말한다(6, 9절).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 끝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세 번째 비유에서도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맏아들이 등장하는 25-32절까지 이어 가신다. 오늘은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11-24절을 따라가되, 수군거리던 사람들 앞에서 하신 이야기라는 점을 끝까지 기억하며 읽는다.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다(12절).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나중에 받을 몫을 지금 달라는 요구였다. 아버지는 살림을 나눠 주었고,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다(13절).
먼 나라에서 그는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없앴다. 마침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는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며 들에서 돼지를 쳤는데, 돼지는 율법이 부정하다고 한 짐승이다(레 11:7).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16절).

하나님께 받은 시간과 재능을 내 몫처럼 여기며 하나님은 찾지 않은 채 한동안 지내는 일이 우리에게도 있다.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는 한참 지나서야 깨닫기도 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는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말했다(17절). 그는 아버지 집의 양식부터 떠올렸다.
그는 아버지께 가서 할 말도 정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절). 하늘, 곧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아버지께도 죄를 지었다는 고백이다.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19절).
돌아갈 이유가 부끄러워서 미루는 때가 있다. 일이 다 막히고 나서야 기도하게 된 자신이 민망해서, 마음이 더 나아지면 그때 나아가겠다고 한다. 둘째 아들의 돌이킴에도 배고픔이 섞여 있었다. 그런 그도 준비한 고백을 품고, 마음먹은 대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다(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20절). '측은히 여겨'로 옮긴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속 깊은 곳에서 불쌍히 여긴다는 뜻의 동사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7:13),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10:33)에도 쓰였다. 아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아버지는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21절에서 아들은 준비한 고백을 말했다. 그런데 19절에서 함께 준비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는 21절에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라고 했다(22절). 살진 송아지를 잡아 함께 먹고 즐기자고 했다(23절). 아들은 품꾼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아버지는 종들 앞에서 그를 "이 내 아들"이라고 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잃었다가'로 옮긴 헬라어 아폴뤼미는 '잃다'와 '망하다'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17절에서 아들이 "주려 죽는구나"라고 할 때의 '죽는구나'와, 앞의 두 비유에서 양과 드라크마를 '잃으면'(4, 8절)에도 같은 동사가 쓰였다. 그 비유들에서 잃은 것을 찾은 사람이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했듯, 이 아버지도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고 잔치를 열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고 말씀하셨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 끝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우리가 고백을 얼마나 잘 갖추었는지에 있지 않고,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께 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맏아들 이야기를 하신다. 잔치 소리를 들은 맏아들은 노하여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에게도 나와서 권했다(28절). 맏아들의 모습은 죄인과 함께 먹는다고 수군거리던 사람들(2절)의 모습과 닮았다.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던 맏아들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앞에서 우리 마음이 굳어 있지는 않은가.
마음에 새기는 질문
-
하나님께 받은 것 가운데 내 것처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미루게 하는 부끄러움이나 핑계가 있다면 무엇인가. 18절의 고백을 내 말로 옮긴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
품꾼의 자리라도 구하던 아들을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이라고 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무엇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주님, 주신 것을 제 것으로 여기며 주님을 떠나 있던 날들을 고백합니다. 돌아갈 낯이 없다고 미루던 저를 아직 거리가 먼데도 보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품꾼의 자리라도 구하던 저를 자녀로 맞아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맏아들처럼 마음이 굳어질 때에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옵소서.
이 묵상은 설교AI가 본문 배경과 원어 자료로 만든 설교 개요에서 출발한 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마태복음 11장 묵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설교 본문으로 개요를 만들어 보고 싶다면 설교AI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